2026
︎︎︎ 신변잡기에 가까운 글 5월 9일 작성 9월 12일 게시
작업을 시작할 적에는 8bit로 이루어진 도트 게임의 스프라이트(sprite)를 모아놓은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다. 게임 안의 도트들은 단순하고 간소화된 형태지만, 현실의 어떤 이미지를 가리키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구현되어 움직인다. 이러한 모양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리고 싶었고, 동시에 그대로 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에 처음 유럽을 여행하며 만난 풍경을 자주 떠올렸다. 특히 스위스에 머무르며 만난 자연의 색채로부터 세계의 색을 몸으로 온전히 만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러한 순간, 몸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있다는 실감은 드로잉으로 이어졌다. 나는 감각을 감지한 순간을 떠올리며 드로잉을 하거나 그 순간을 곧바로 화면에 잡아채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게임의 스프라이트 형태들이 작업 안에 나타났다.
초기 작업은 느낀 것을 형상화한 드로잉에 색이라는 속성을 더하는 것에 집중했다. 작업을 지속하며 점차 특정한 풍경에서 멀어져 몸이 세계를 감각하는 과정 자체를 화면 안에 붙잡고, 이를 전시 공간으로 펼쳐내는 관심으로 확장하고 있다. 2022년 첫 개인전 《CUT IN: 몸을 통과하는 풍경들》(성수 볼록, 서울)에서는 ‘어떠한’감각을 지칭하는 회화를 모으고, 눈높이를 벗어나는 몇몇 설치를 통해 전시 공간 자체를 ‘어떠한’풍경 처럼 보이도록 했다. 전시 공간의 중심에 있는 원형의 설치 작업과 천장 또는 기둥에 설치된 회화들은 동선을 유도하며 전시 공간을 바라보는 모든 시야에 간섭한다. 관객이 ‘회화’를 보는 것뿐 아니라 ‘회화가 놓인 상태’를 능동적으로 관람하기를 바랐다. 2023년 두 번째 개인전 《Flow sequence》(유영공간, 서울)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공간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본래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기 때문에 방이 분리되어 있었고, 전시 공간을 3구역으로 나누어 3개의 씬(scene)을 만들었다. 각각의 씬에 들어가는 작업을 한 묶음으로 생각해 회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전시를 관람하는 두 종류의 시선을 만들고자 전시 공간 곳곳에 구를 비치했는데, 관객이 회화를 따라가는 시선과 구를 따라가는 시선을 교차하며 전시 보기를 바랐다. 2024년에는 2인전 《타법(打法》(씨위씨, 울산)을 개최했다. ‘타법’은 ‘회화를 만드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으며, 회화를 다루는 두 작가의 작업 방식과 태도 및 교류를 조망하여 제시한다. 전시를 진행하기에 앞서 전시 공간을 레지던시 삼아 동료 회화 작가와 함께 사용하며 지금까지 구축해 온 작업적 선택을 되짚고 유화 작업만이 만들 수 있는 표면의 상태와 물감의 물리적 중첩에 대해 탐구했다.
이 시기에는 내가 왜 몸으로 감지하는 것에 기민하게 반응해 왔는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세계를 무감각하고 평평하게 인지해 왔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감각이나 몸이 실재함을 선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몸은 자신이라기보다 잘못 주어진 것에 가까워서, 외면해 온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세한 감각의 변화, 세계에 놓여진 내 몸이 ‘자신’이 되어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에 반응하려 했던 것 같다. 이후 몸을 세계와 관계 맺는 주체로 이해하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공감해 온 것을 다시 이해하기도 했다.
2025년에는 지금까지 그려온 이미지들을 점검하고 ‘감각의 시각화’라는 주제를 더 선명히 하기 위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을 찾아다니며 사생(寫生)하는 시간을 가졌다. 평소 하던 잡아채 두는 드로잉과 달리 한 자리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고, 감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를 통해 최근에는 더 솔직한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래 좋아해 온 게임과 부모님의 만화 대여점이라는 환경에서 자라 형성된 조형 언어 같은 것들을 더 드러내 보고 싶다. 2026년의 2인전 《여덟 쪽의 종이 Eight Folds》(유영공간, 서울)는 그 첫 번째 시도였다. 페인팅이 되기 이전의 생각을 페인팅과 아티스트북으로 작업하여, 하나의 생각을 서로 다른 각각의 매체로 만들었다. 페인팅이 감각이 응축된 장면이라면, 책은 응축 이전의 모든 장면을 구조화한다. 앞으로는 만화적인 질서를 화면을 넘어 공간 전체로 확장하고 싶다. 특정한 이미지를 감상하는 방식보다 관람자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며 완전히 설계된 화면과 화면끼리의 관계를 알아차리도록 하고 싶다. 나는 그림을 보는 일이 누구든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 역시 그리는 나와 보는 이 모두 회화를 통해 다른 감각으로 몰입하도록 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2026.5.9.
2026.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