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임성희, Artist Statement
뜨거운 여름날 실내에서 밖으로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턱끝까지 차오른 습한 열기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통과하는 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빽빽한 숲속에서 파란 이파리들이 바람에 스치며 만드는 틈으로 부서지듯 쏟아지는 햇빛을 본 적이 있는가? 팔랑거리는 눈송이가 머금은 차가운 고요, 후두두 떨어지는 빗줄기의 무게가 느껴질 때, 풍경 안에 위치한 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시간에 따라, 날씨와 계절에 따라, 풍경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풍경의 역동이 불러일으킨 몸의 감각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의 솜털과 살갗으로 느끼게 되는 움직이는 풍경과의 공감각적인 조응은 나에게 그림을 그리게끔 하는 동기가 된다.
나의 작업은 풍경과 조응한 순간의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움직이는 풍경을 쫓으며 감각을 불러일으킨 순간을 잡아채기 위해 나는 주로 빠른 선으로 드로잉한다. 그 과정에서 뻗어있는 나뭇가지의 방향, 바람에 눕는 수풀의 모양, 흘러가는 구름의 윤곽, 물결의 흐름, 햇빛의 반짝임 같은 자연의 움직임은 매우 추상적인 기호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내 몸의 감각과 내면의 감정,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손의 협력으로 단번에 진행되는 무의식적인 이미지다. 그것을 캔버스에 옮기면서 나는 다시 그 풍경 안으로 소환된다.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면서도 현재의 감각에 따라 색과 형태를 정하고 붓질을 더한다. 같은 이미지를 옮기는 것이지만, 드로잉을 했던 ‘그때의 지금’과 캔버스 앞에 선 ‘현재의 지금’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나는 드로잉의 선을 색과 형태로 해석하는 동시에 유화의 레이어를 의식한다. 레이어는 곧 물감의 중첩이기에, 풍경 이미지와 기호 이미지의 순서와 각 레이어의 건조 정도를 고심하며 그려나간다. 이 과정에서 풍경과 기호는 형태적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들은 뒤덮이거나 투명하게 겹쳐져 드러난다. 또 어떤 부분들은 화면의 질서 안에 완전히 스며들기도 하며 뒤섞인다. 움직이는 풍경은 나를 통해 작업 안에서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움직임은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인 상태로, 작품의 제목이 모두 현재 진행형인 것도 그 때문이다.
햇빛의 눈부심을 표현한 반짝이, 구름의 형태를 표현한 윤곽선, 바람의 흔적을 표현한 효과선 등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기호들은 만화의 표현 방식과 닮아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이며, 그 배경에는 부모님의 만화 대여점에서 자란 어린 날의 내가 있다. 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틈입한 출판만화의 문법은 나의 시각성에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를 자각하기 전에는 의식적으로 풍경과 기호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체화된 시각언어로서의 기호들은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의 내 드로잉에 계속해서 등장했다. 기호의 출처를 깨달은 뒤에는 그것이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더 이상 풍경과 기호를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사용하는 기호는 ‘내 몸을 통과한 풍경’을 표현하는 일종의 증거로서 작동한다. 최근에는 오히려 이러한 시각성을 확장시켜 전시 공간에 만화책의 프레임처럼 작품을 배치하거나, 드로잉을 엮어 책을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마치 만화책을 펼쳤을 때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등장인물들이 움직이고 스토리가 진행되듯, 내 작업들도 단일한 이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갖고 연결되길 바란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지금’의 시간 속에서 감상자들도 내가 느낀 풍경의 역동성을 ‘현재 진행 중’인 상태로 감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의 고유성은 주관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동시대는 가상공간에서의 경험이 일상이 되었으며, 이는 얼핏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대안적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상에서는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고, 납작한 액정 안의 경험이란 잠깐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나는 직접적인 몸의 경험을 통과하는 미술 작업이야말로 실재하는 ‘바로 지금’을 담아낼 수 있으며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작업은 몸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써 실존을 느끼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2025.7.15.
2024
원소영, Swish-
2인전 《타법(打法)》 (2024, Sywisy) 서문
타법(打法)은 여러 분야에서 무언가를 다루는 방법을 칭한다. 야구나 골프 같은 스포츠에서는 공을, 북이나 장구 같은 타악기에서는 악기를 치는 법을, 타자기나 문서 작성 도구에서는 글쇠를 눌러 글자를 찍는 방법을 일컫기도 한다.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타법은 키보드와 내 손이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글을 쓸 때 무심코 쓰게 되는 대쉬(-)이기도, '~하기' 따위의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 내 글쓰기 습관이기도 하다. 구글 문서로 글을 쓰고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Command+S를 누르는 동작-문서 저장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나, 글을 쓰다 한숨 돌리게 하는 심리적인 기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빈과 성희에게 ‘타법’은 회화를 만드는 방식을 의미한다. 회화는 그 완결된 이미지에 대한 해석으로써 읽힌다. 혹은 완결된 지지체가 관람자와 맺는 관계를 통해 해석된다. 《타법(打法)》은 그에 우선하는 회화를 만들어내는 작가, 그 몸에서 이어지는 붓의 운동성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나의 상상력은 판자 조각이고 / 도구로는 / 나무 작대기 하나가 전부다 / 판자를 치면 / 그것 내게 응답한다 / 그래-그래 / 아니-아니1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 「문 두드리는 고리쇠(1957)」 와 회화에서의 붓은 일견 유사한 면모가 보이기도 하는데, 관계 맺기-약한 타격-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치고-응답하기의 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 회화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나, 실상 그 자신의 표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붓(도구)으로 바탕을 만져 표면을 지어 올리고(혹은 허물어 내면서) 남겨진 것들이 이미지로 보여지며 읽히는 것이 회화가 그 자신이 되는 과정이다. 표면과 이미지2로 표현되는 회화는 감각과 독해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읽을 수 없는 이미지와 만질 수 없는 표면으로 인해 물러난 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틈새 사이에는 추측할 수 있는 이미지와 볼 수 있는 표면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러한 조각 외침들을 모아 회화를 ‘본’다.
그럼에도, 또 다른 각도에서-회화는 이해를 벗어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한 장소에 있는 모든 기호성을 가진 것들의 숫자를 세며 그룹화하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책을 읽을 때 나오는 반점과 온점, 길에 세워진 가로등, 아스팔트에 그려진 지시선 따위의 것들, 1부터 10까지 같은 기호들을 세어 묶어 두고-이들은 ‘같은 것(혹은 같아도 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어릴 때부터 있던 고약한 버릇이자 일종의 강박이다. 그런데, 이따금 회화를 마주할 때는 이 기호성의 묶음이 탈각되곤 한다.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세어가며 묶다가도, 자꾸만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성희의 반짝이들이나, 정빈의 스트로크와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성희의 끼어듦3이 쌓인 경험한 풍경 위 반짝이들은 만화적 도상으로 표현되나, 마치 그 풍경 안에서 쏟아진 빛들을 한 움큼 주워 담아 얹어 둔 듯이 스미어 있다. 성희의 풍경은 마치 노란 등불을 켜 둔, 눈밭이 펼쳐진 숲속을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듯(〈이르는 풍경〉(2023)) 보이기도 하고, 오페라글라스로 호수 위 윤슬을 바라보는 듯(〈찰랑이는 풍경〉(2023)) 보이기도 한다. 반짝이는 이펙트와 라인의 플로우는 그 풍경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신체와 시선을 더 명확한 동선으로 가시화 시킨다.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가지는 공간을 경험하는 감각은 여러 겹의 시간을 통해 겹쳐 있는데, Swish- 되는 시선은 이 이펙트들을 통해 과거의 시선에서 풍경으로 들어가는 방향성을 경험한다.
정빈의 회화에서 등장하는 스트로크들은 그가 지속해 고민해 온 뼈들을 닮아 있는 듯하다. 그의 풍경은 곧고, 어딘가 휘어 있는 비계4들이 모여 있는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빈은 자신이 바라본 대상의 뼈-Core-를 촘촘히 고민하고, 그 형상을 오롯이 드러내는 스트로크로 표면을 구성한다. 색을 뭉개고 긁어내며 Swish- 되는 풍경은 판판하게 눌리며 뼈와 같은 모양새로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정빈의 스퀴즈는 형상을 구현하기 위한 궤적이기보다는, 형상을 재현하지 않기 위한 궤적으로 작동하며 일련의 뼈-스트로크를 구축한다.
회화에서 등장하는 형상들은 하나의 기호로 묶이기를 거부한다 성희의 반짝이들은 같은 시간의 레이어에 얽혀 있기를 거부하며, 정빈의 스트로크는 하나의 형상이기를 거부한다. 정빈과 성희의 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은, 이들이 그려내는 것은 출발지도, 목적지도 불분명한 대화의 상태라는 것이다. 회화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눔, 혹은 그런 이야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회홧말이 종료되는 시점은 일방적으로 정할 수 없다. 서로를 달래가며 나누던 대화는 어느 순간 건네진 안녕으로 인해 멈춰지고, 완성을 마주하게 된다. 회화의 결말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친구와 할 법한 대화를 추측하는 것이 어렵듯-예상은 얼핏 들어맞는듯 보이지만, 그 상세는 반드시 다르기 마련이다. 회화는 이토록, 그 자신의 구체적임으로 예측을 벗어난다.
이해와 예측을-묶음에서 벗어나는 회화는 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가?
회화는 이미지를 구성하지만, 선명한 물질로 그것을 만들어낸다. 즉 묵직한 물질성을 가지는 이미지이다. 도톰한 물질이 되기 위해 스미는 우연들은 통제 불가능한 몸에서 시작한다. 유화는 여러 매체 중에서도 꽤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작업에 필요한 시간으로 인해 작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그리는 모든 과정을, 거리를 두고 마주해야 한다. 그 시작과 끝 사이 매여 있는 시간의 틈에서 우연은 어쩔 도리 없이 발아한다. 이 우연은 꽤나 사소하기도, 거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판단의 전환일 수도, 그날의 컨디션일 수도, 실수로 튀어 버린 기름일 수도, 작업실에 가는 길에 본 흐드러지는 목련잎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언제나 공생하는 작은 친구들-날파리, 나방파리, 모기 따위의-까지 분류하기도 어려운 것들이 캔버스 위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표면과 몸의 거리가 가까운 회화는 그만큼 개개별의 요소가 통제 불가능한 몸의 연장선에서 작동한다.
정빈의 회화에서 출발은 큰-하나의 획이다. 쌓이고 쌓인 획이 맺는 관계에 의해 화면은 조율되며, 우연히 그어진 스트로크로 인해 장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한다. 〈뒤피 숲〉(2023)의 웨이브 진 스트로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빈의 화면은 캔버스의 흰색에서 시작한다. 그의 화면에서 이 흰색은 〈북한산 고사리〉(2023)에서의 스트로크가 얇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듯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것처럼, 〈아라숲〉(2024), 〈저녁〉(2024)에서 밝은 빛의 표현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이 정빈의 흰색은 이번 전시의 작업 중 〈태안〉(2024)의 한 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이는 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 비친 윤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흰색들은 캔버스가 마치 라이트박스 위에 놓인 것처럼 빛을 머금은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이들 풍경에서 빛과 색으로 작용하는 흰색은 정빈이 이 작업에서 처음 대면한 캔버스의 색이다. 표면에 남겨져 있는 이 흰색들은 그 위에 쌓인 물감을 밀어냈을 스퀴즈의 운동성과 더불어, 이 가장 얇은 표면을 작품의 완성까지 보존해 온 정빈의 타법을 완성에서부터 되짚어 읽어볼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이 흰색은 불투명한-화이트를 사용한-색과 구별되는데, 분할된 획들로 인해 선명히 드러나는 스트로크들이 정빈의 회화에서 흐른 시간, 그가 잡았을 도구와 손의 자세, 팔의 궤적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성희의 〈내려오는 풍경〉(2024)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은 아마 파랑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가면 흰색이,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보라색도, 한 번 더 가까이 가면 비로소 노란색이 보일 것이다. 성희는 작업에서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여러 겹의 레이어를 쌓아올린다. 이 레이어의 아래쪽은, 완성된 작품에서는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다른 색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성희의 회화에서 풍경들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해체 혹은 재해석하는 대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오랜 기간 바라본 풍경을 겹겹이 담아내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감각의 경험을 얹어가는 곳이다. 그로 인해, 단면의 흰색으로 칠해진 이펙트들조차 그 아래에 있는 풍경의 색을 머금고 있다. 자근히 배어 있는 아래 겹의 색감을 잘 볼 수 있는 〈희미하고 반짝이는 1-3〉(2024)은 풍경의 형상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여러 겹의 그라운드로 인해 마치 어떤 공간에 있는 듯한 감상을 전달해 준다. 이 아스라이 쌓인 그라운드의 색들은 성희가 경험한 풍경의 감각을 유추하게 만들며, 그 위에 쌓이는 이펙트의 레이어로 인해 그가 겹쳐 놓고 있는 다른 종류의 공간에 대해 읽어볼 수 있게 한다. 단일한 표면 위에 거주하고 있는 장면들과 감각들은 서로에게 끼어들며 회화를 완결 짓는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물질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한 대화이지는 않을까- 《타법(打法)》 전시가 있기 몇 주 전, 정빈과 성희는 장춘(長春) 캠프5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회홧말을 나누며 정빈은 〈인셀 홈브로이히 Insel Hombroich〉(2024)를, 성희는〈내려오는 풍경〉(2024)을 그려냈다. 서울을 베이스로 작업하는 두 작가는 장춘캠프를 위해 (1) 정해진 시간 안에 (2) 평소와 다른 공간에서 (3) 서로가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4) 제약된 재료를 가지고 (5) 완성 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자신이 구축해 온 작업 방식을 톺아보며 작업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 레이어를 쌓는 방식,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와 드로잉 등을 서로에게 공유하고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재료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정빈와 성희는 되짚어갔던 자신의 회홧말을 Sywisy(씨위씨)에서 펼쳐보며 빈 캔버스에서부터 대화의 종결까지 서로의 과정을 지켜봤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정빈과 성희는 자신의 타법에 대해, 회홧말에 대해 나눈 대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타법(打法)》을 나누는 자리가 이들의 회화가 유동한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1 시의 전문은 이 책을 참조하라. Herbert Zbigniew, 「문 두드리는 고리쇠」,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 문학동네, 2014, 126쪽.
2 이미지는 사물 자체가 말하고 침묵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한다. Rancière Jacques,『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30쪽.
3 임성희는 ‘풍경 안에서 느껴지는 빛, 바람, 소리 또는 생각을 완전히 단절시키며 떠오르는 감각 등’을 ‘끼어듦’이라 부른다.
4 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5 전시가 진행되는 공간 Sywisy에서 진행된 단기 레지던시 (2024.4.23.-2024.5.10.)
2023
조유경, 바라보고 통과하는, 흐르다 다다르는
개인전 《Flow sequence》 (2023, 유영공간) 서문
우선, 전시장을 쓰윽~ 둘러보자.
하얗고 고르지 못한 벽들은 경계 아닌 경계들로 막혀 있기도, 벽이어야 하는 공간은 유리가 달리지 않은 창으로 뚫려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경계들을 유연히 흐르는 회화의 선들, 생동하는 푸른색들, 그리고 그림에서 나와 전시장과 작품의 경계를 이어주는 원형의 입체들. 모두 임성희가 만든 장면(sequence)1들이다.
작가 임성희의 작업은 단순히 지나가는 '풍경' 혹은 '배경'이었던 찰나를 기민하게 기록해두는 습관들로부터 시작된다. 자주 걷는 산책길, 새로이 걷는 낯선 장소들, 작가가 직접 땅을 딛고 움직이며 만나는 풍경들에서 지각한 작가만의 회화적 순간들을 포착한다.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사진과 드로잉들은 캔버스로, 또, 새로운 종이에 옮겨 담아지면서 당시의 감각을 새로이 구성한다. 그 다층적 감각의 일부인 나뭇잎에 스친 햇빛의 반짝임, 잠시 지나는 바람에 살랑이던 그림자, 코끝에 스친 바람의 향들은 작가만의 도상이 되어 평면에서 흐르게 된다.
기록된 구체적 이미지들과 작가의 경험으로 자리 잡은 감각의 편린, 관심으로 탐구하는 만화나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의 효과로 보이는 도상들이 응축된 이미지로 한 화면에 모여 색으로, 자연의 형태로, 붓의 자욱들로 해제되고 또 이접되면서 임성희만의 미장셴2이 만들어진다. 이 감각의 회화는 모든 지각적 의식이 감각을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흐름으로 나타나게 된 도상들은 더 이상 의식의 실재적 요소로서 전제되어지지 않는다.3
풍경으로 시작한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인 감각들로 번역되어, 작가에게 어떤 의미로서 인식되어지는지, 스스로의 감각이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추적하며 시공의 차원을 확장시키는 과정을 이어간다. 그 안에 하얀 빛의 도상, 둥근 형체 그리고 흔적처럼 남겨지는 나선의 형태들은 불연속적 장면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복수의 캔버스들은 연결된 장면들로 읽히게 되고, 더불어 전시되어진 회화 밖 공간으로까지 장면이 연장됨을 연출하며 평면인 회화와 하얀 전시공간의 벽에 생명력과 새로운 장면으로서의 기능을 부여한다.
전시공간은 임성희의 프레임이자 큰 캔버스 혹은 이야기가 되어 감상하러 들어온 우리를 감각하게 하며 많은 장면들과 마주하게 만든다. 평면으로부터 입체적 차원으로 증폭된 회화의 연출은 관객인 우리의 개인적 풍경을 꺼내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 안에서 자연의 생명력도 그림의 생동함도 마주한다. 바라보고, 통과하며, 다가가고, 올려다보는 [Flow sequence]의 모든 풍경들을 감각하며, 더 많은 이야기에 다다르게 할 임성희의 푸르른 새 계절을 기다린다.
1 영화 용어. 특정 상황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묘사하는 영상 단락 구분을 의미한다. 몇 개의 신(scene)이 한 시퀀스를 이룬다. 신은 한 개 이상의 쇼트(shot)가 이룬 장면. 다시 말해 쇼트가 신을 이루고 신이 시퀀스를 이룬다. 시퀀스는 책의 장(chapter)에 비유할 수 있는데 뚜렷한 시작, 중간, 결말을 갖고 완전히 독립적인 기능을 하면서 보통 극적 절정의 유형으로 마무리된다.2 장면화(putting into the scene), 혹은 '장면의 무대화'라는 개념. 영상미학의 의미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는 용어.
3 Gilles Deleuze, 하태환역, 감각의논리, 믿음사, 1995, p78
2022
김재연, 풍경의 꺼풀을 한 겹씩 걷어내면
2인전 《Walk & Talk》 (2022, 공간 파도) 서문
추운 겨울이 되어 지난 여름날의 산책을 되돌아본다. 차가워진 공기 탓에 무더웠던 날의 감각을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여름에 시작하여 가을에 끝나기까지, 이경민과 임성희는 한 달에 한 번의 산책을 함께했다. 이번 전시에서 두 사람은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의 경험을 그린 그림이 서로 교차하는 방식을 실험한다.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계절의 감각을 끄집어내어 각자가 회화를 다루는 방식으로 지난 산책을 돌이켜본다.
두 작가는 몸으로 받아들인 풍경을 그린다. 걸으며 마주하는 빛과 색의 미세한 진동은 눈보다는 몸으로 발견되는 법이다. 둘은 관찰자의 위치에 있기보다는 '나'와 풍경 사이 경계가 흐려지는, 눈으로 잡아둘 수 없는 몸의 감각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후덥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목욕하는 참새의 날갯짓, 푸른 하늘과 초록 나무의 대비되는 색에서 움직임을 살핀다. 그리고 몸으로 읽어낸 그날의 풍경에서 몇 가지 것들만 남긴다. 마치 여러 장의 이미지를 겹쳐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셀 애니메이션의 투명한 필름을 하나씩 분리하듯, 작가의 몸을 거친 풍경은 한 겹씩 그 층을 걷어낸다.
둘은 이렇게 걷어낸 층을 가지고 몸으로 느꼈던 풍경의 부피감을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피감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숨겨져 있는 두께를 가진다. 투명한 층에 그려진 선들이 그림 위로 한 겹 한 겹 쌓이는 것을 상상해본다. 두 작가는 또렷한 선을 하나씩 올려 몸의 기억을 복귀시킨다. 이렇듯 풍경에서 추출된 잔상은 다시 작가의 몸에 의해 눈에서 손으로 캔버스 위에 옮겨져 조합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부분에는 산책하다 나눈 대화가 묻어있기도, 흔들리는 나뭇잎의 움직임과 바람의 방향이 캔버스 위에 조각조각 남아있을 것이다. 이렇게 풍경의 꺼풀 너머에 보이지 않던 감각이 캔버스에 얹어진다. 특히 두 작가의 작업에는 풍경에서 느낀 서로 다른 속도의 시간이 두텁게 올라간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 작업과 다른 형식을 사용해 시간을 표현한다. 이경민은 과거 〈매일의 꽃〉(2021)과 〈구름의 경계〉(2020~)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듯이, 축적된 매일의 시간을 이어 긴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작은 움직임에서 선을 하나씩 떠내어 그림에 붙여 올리는 방식은 지속되는 일상의 시간을 섬세하게 기록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한지에 그린 여러 장의 그림을 캔버스 위에 배접하는 방식을 취해 겹겹이 쌓이는 시간을 보여준다. 반면 임성희는 한 손으로 낚아채는 빠른 순간의 시간을 남긴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점멸하는 모습을 포착하듯 캔버스 위에 남긴 반짝이는 도상은 찰나의 움직임을 잡기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눈을 옮길 때 발생하는 속도감을 중요하게 여겨온 그는 이번 작업에서 캔버스 안에 분할된 풍경을 중첩시켜 그 안에서의 속도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두 작가 모두 고정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 풍경에서 점차 다른 풍경으로 옮아가는 시간을 각자의 속도로 이어간다.
몸으로 느낀 풍경을 회화로 옮길 때, 이경민과 임성희는 평면의 캔버스에 투명한 부피를 얹어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분명 산책하며 나누었던 그날의 대화와 감정도 그들의 그림 안에 보이지 않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차츰 따뜻해지는 날이 오면 두 작가가 이 전시의 풍경을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보게 될지 궁금해진다.
2022
원소영, CUT IN; 끼어들기, 작동하기.
개인전 《CUT IN: 몸을 통과하는 풍경들》 서문
자, 한번 상상해보자.
당신의 눈 앞에 아주 멋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풍경 속에 있는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1) 핸드폰을 보고있다. (2) 사진을 찍고 있다. (3)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고 있다. (4) ・・・(풍경을 보고 있다.)
*복수응답은 가능하다. (1-4-2-3-2-1-3)의 순서가 대중적이라 생각한다.
분주한 신체는 어느새 당신이 바라보고 있던 것을 한데 합쳐 놓는다.
달이 나를 따라온다-
풍경은 더 이상 멀리 있는 대상으로 남아있지 못한다. 당신은 신체로 서서 반짝이는 경험과 섞여 '바라본다. 시선은 이미 기억 속에 하나의 장면으로 프레이밍 되어 남는다. 이 기억 속의 장면은 사진 속의 장면으로도 남는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치하지 않는다. 불일치를 겪고통과하지 못하는 이미지들을 몸을 통해 통과시켜보자. 멋진 풍경들이 나올것이다.
임성희는 신체를 딛고 선 풍경을 그려낸다. 이 풍경은 우리의 신체를 움직인다. 그림 속 풍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 위에 끼어든 반짝이거나 흐르는 도상들은 그 거리를 한순간에 좁혀버린다. 도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 풍경은 우리의 눈 바로 앞에 있는 스마트폰 속의 만화나 웹툰으로 들어가 사진이나 그림이 되어버린다. 화면 속의 그것과 같이 가까워진 시야는 한정 지어진 프레임에 튕겨 나와 다시금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으로 들어간 관람자의 시야는 또 다른 신체가 되어 그림/풍경을 프레이밍 한다.
풍경 위로 침투한 불연속적인 형상은 그로 인해 우리에게 공간을 작동시킨다. 이 공간은 객관적 세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는 풍경이다. 실루엣으로 합쳐진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어떤 순간을 포착한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 위에 끼어든 반짝이와 흐르는 도상은 분명히 현실에서 '볼수는 없는 이펙트들이다. 화면 속에만 있어야 할 이펙트가 현실의 공간으로 끼어 들어왔다. 침투한 이펙트로 인해 공간은 일련의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가 된 공간의 풍경은 뛰어다니는 불연속적 형상의 배경이 된다. 풍경 속에서 나온 그것은 다음 프레임으로, 또 다음 프레임으로 뛰어다니며 이 풍경들을 연결시킨다. 연결의 흐름은 우리의 시선이 되며 형상의 성질을 우리의 신체로 끌어들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감각하는 시선이 경험되는 방식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다. 신체는 고정되지 않으며 풍경 또한 그 신체를 따라온다. 이때 따라오는 풍경에 이펙트가 끼어드는 현상은 이미지의 공간과 실제의 공간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 그 경계는 분리할수없고 우리의 감각은 뒤섞인 채로 경험된다. 이 작동되는 망막의 풍경을 살펴보며 우리의 신체가 거주하는 공간에 대해 톺아볼 수 있다.
2021
장유정, 전시서문
2인전 《날씨가 너무 좋아요》 (2021, 공간 풀무질) 서문
임성희는 자신이 감각했던 시공간을 떠올리며 그 순간의 흐름, 방향, 빛, 소리 등 신체가 겪었던 공감각을 회화로 보여주고자 한다. 시야 밖 도로에서 들려오는 차들의 소리, 서늘하게 불어오는 저녁 바람, 사선으로 떨어지는 전조등 빛, 문득 떠오른 생각 같이 어떤 풍경에 놓여진 작가의 신체가 불연속적으로 겪는 순간들을 한 장면의 회화로 옮긴다. 이 그림들은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풍경 사이의 거리가 없다. ‘어떤 (장소의) 풍경’ 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의 일부에 속한 나의 몸이 인지한 그 순간을 그린다. 이를 작가 본인은 “몸을 통과하는 풍경들” 이라 칭한다. 중간중간 갑작스레 등장하는 만화적 장치들은 어떤 서사에 종속되지 못하고 풍경 사이에서 병치되고 분리되고 발산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풍경은 고정된 중심이 부재한 다소 분열증적인 추상이 되었다. 그때 그 곳에서 겪은 무형의 힘을 회화로 옮긴다는 것이 어쩌면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신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과정을 본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생동하는 힘으로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마주하게되는 위태로운 감정들이 있다. 이 감정들이 마음을 좀먹고 때로는 저 깊은 곳까지 푹 적셔버리지만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보송한 나날이 온다. 정다원은 이 축축한 감정들의 출현을 저항하는 대신 똑바로 응시한다. 시간이 지나 감정들이 사그라들면 그곳에 남겨진 것들을 곱씹어 회화로 옮긴다. 그렇기에 정다원의 그림들은 변화무쌍한 색채와 붓터치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내면을 돌보는 명상과도 유사하다. 자신의 삶에서 마주친 우울, 불안, 허무와 같은 감정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받아들인다. 그 버거운 감정들을 감당하는 것이 식은땀이 나고 울렁거리지만 곧 잠잠해지는 순간이 오고 찌꺼기들만 말라붙어 남겨진다. 그간의 시간이 묽게 주르르 흘러버리지 않도록 작가는 남겨진 이 찌꺼기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성실한 붓질로 캔버스에 담는다. 공空한 세계에서 텅 비어버리는 것 대신 우직하게 무언가를 계속 그리는 것을 택한 작가의 태도가 그의 그림들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다정한 날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