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
︎작가노트



[Swish-]

타법(打法)은 여러 분야에서 무언가를 다루는 방법을 칭한다. 야구나 골프 같은 스포츠에서는 공을, 북이나 장구 같은 타악기에서는 악기를 치는 법을, 타자기나 문서 작성 도구에서는 글쇠를 눌러 글자를 찍는 방법을 일컫기도 한다.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타법은 키보드와 내 손이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글을 쓸 때 무심코 쓰게 되는 대쉬(-)이기도, '~하기' 따위의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 내 글쓰기 습관이기도 하다. 구글 문서로 글을 쓰고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Command+S를 누르는 동작-문서 저장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나, 글을 쓰다 한숨 돌리게 하는 심리적인 기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빈과 성희에게 ‘타법’은 회화를 만드는 방식을 의미한다. 회화는 그 완결된 이미지에 대한 해석으로써 읽힌다. 혹은 완결된 지지체가 관람자와 맺는 관계를 통해 해석된다. 《타법(t打法)》은 그에 우선하는 회화를 만들어내는 작가, 그 몸에서 이어지는 붓의 운동성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중략)

성희의 〈내려오는 풍경〉(2024)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은 아마 파랑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가면 흰색이,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보라색도, 한 번 더 가까이 가면 비로소 노란색이 보일 것이다. 성희는 작업에서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여러 겹의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이 레이어의 아래쪽은, 완성된 작품에서는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다른 색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성희의 회화에서 풍경들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해체 혹은 재해석하는 대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오랜 기간 바라본 풍경을 겹겹이 담아내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감각의 경험을 얹어가는 곳이다. 그로 인해, 단면의 흰색으로 칠해진 이펙트들조차 그 아래에 있는 풍경의 색을 머금고 있다. 자근히 배어 있는 아래 겹의 색감을 잘 볼 수 있는 〈희미하고 반짝이는 1-3〉(2024)은 풍경의 형상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여러 겹의 그라운드로 인해 마치 어떤 공간에 있는 듯한 감상을 전달해 준다. 이 아스라이 쌓인 그라운드의 색들은 성희가 경험한 풍경의 감각을 유추하게 만들며, 그 위에 쌓이는 이펙트의 레이어로 인해 그가 겹쳐 놓고 있는 다른 종류의 공간에 대해 읽어볼 수 있게 한다. 단일한 표면 위에 거주하고 있는 장면들과 감각들은 서로에게 끼어들며 회화를 완결 짓는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물질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한 대화이지는 않을까- 《타법(打法)》 전시가 있기 몇 주 전, 정빈과 성희는 장춘(長春)캠프5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회홧말을 나누며 정빈은 〈인셀 홈브로이히 Insel Hombroich〉(2024)를, 성희는 〈내려오는 풍경〉(2024)을 그려냈다. 서울을 베이스로 작업하는 두 작가는 장춘캠프를 위해 (1) 정해진 시간 안에 (2) 평소와 다른 공간에서 (3) 서로가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4) 제약된 재료를 가지고 (5) 완성 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자신이 구축해 온 작업 방식을 톺아보며 작업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 레이어를 쌓는 방식,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와 드로잉 등을 서로에게 공유하고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재료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정빈와 성희는 되짚어갔던 자신의 회홧말을 Sywisy(씨위씨)에서 펼쳐보며 빈 캔버스에서부터 대화의 종결까지 서로의 과정을 지켜봤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정빈과 성희는 자신의 타법에 대해, 회홧말에 대해 나눈 대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타법(打法)》을 나누는 자리가 이들의 회화가 유동한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5 전시가 진행되는 공간 Sywisy에서 진행된 단기 레지던시 (2024.04.23. - 2024.05.10.)


[바라보고 통과하는, 흐르다 다다르는]

우선, 전시장을 쓰윽- 둘러보자.
하얗고 고르지 못한 벽들은 경계 아닌 경계들로 막혀 있기도, 벽이어야 하는 공간은 유리가 달리지 않은 창으로 뚫려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경계들을 유연히 흐르는 회화의 선들, 생동하는 푸른색들, 그리고 그림에서 나와 전시장과 작품의 경계를 이어주는 원형의 입체들. 모두 임성희가 만든 장면(sequence)1들이다.

작가 임성희의 작업은 단순히 지나가는 '풍경' 혹은 '배경'이었던 찰나를 기민하게 기록해두는 습관들로부터 시작된다. 자주 걷는 산책길, 새로이 걷는 낯선 장소들, 작가가 직접 땅을 딛고 움직이며 만나는 풍경들에서 지각한 작가만의 회화적 순간들을 포착한다.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사진과 드로잉들은 캔버스로, 또, 새로운 종이에 옮겨 담아지면서 당시의 감각을 새로이 구성한다. 그 다층적 감각의 일부인 나뭇잎에 스친 햇빛의 반짝임, 잠시 지나는 바람에 살랑이던 그림자, 코끝에 스친 바람의 향들은 작가만의 도상이 되어 평면에서 흐르게 된다.
기록된 구체적 이미지들과 작가의 경험으로 자리 잡은 감각의 편린, 관심으로 탐구하는 만화나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의 효과로 보이는 도상들이 응축된 이미지로 한 화면에 모여 색으로, 자연의 형태로, 붓의 자욱들로 해제되고 또 이접되면서 임성희만의 미장셴2이 만들어진다. 이 감각의 회화는 모든 지각적 의식이 감각을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흐름으로 나타나게 된 도상들은 더 이상 의식의 실재적 요소로서 전제되어지지 않는다.3 

풍경으로 시작한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인 감각들로 번역되어, 작가에게 어떤 의미로서 인식되어지는지, 스스로의 감각이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추적하며 시공의 차원을 확장시키는 과정을 이어간다. 그 안에 하얀 빛의 도상, 둥근 형체 그리고 흔적처럼 남겨지는 나선의 형태들은 불연속적 장면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복수의 캔버스들은 연결된 장면들로 읽히게 되고, 더불어 전시되어진 회화 밖 공간으로까지 장면이 연장됨을 연출하며 평면인 회화와 하얀 전시공간의 벽에 생명력과 새로운 장면으로서의 기능을 부여한다.

전시공간은 임성희의 프레임이자 큰 캔버스 혹은 이야기가 되어 감상하러 들어온 우리를 감각하게 하며 많은 장면들과 마주하게 만든다. 평면으로부터 입체적 차원으로 증폭된 회화의 연출은 관객인 우리의 개인적 풍경을 꺼내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 안에서 자연의 생명력도 그림의 생동함도 마주한다. 바라보고, 통과하며, 다가가고, 올려다보는 [Flow sequence]의 모든 풍경들을 감각하며, 더 많은 이야기에 다다르게 할 임성희의 푸르른 새 계절을 기다린다.

영화 용어. 특정 상황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묘사하는 영상 단락 구분을 의미한다. 몇 개의 신(scene)이 한 시퀀스를 이룬다. 신은 한 개 이상의 쇼트(shot)가 이룬 장면. 다시 말해 쇼트가 신을 이루고 신이 시퀀스를 이룬다. 시퀀스는 책의 장(chapter)에 비유할 수 있는데 뚜렷한 시작, 중간, 결말을 갖고 완전히 독립적인 기능을 하면서 보통 극적 절정의 유형으로 마무리된다.
장면화(putting into the scene), 혹은 '장면의 무대화'라는 개념. 영상미학의 의미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는 용어.
Gilles Deleuze, 하태환역, 감각의논리, 믿음사, 1995, p78


[CUT IN; 끼어들기, 작동하기.]

임성희는 신체를 딛고 선 풍경을 그려낸다. 이 풍경은 우리의 신체를 움직인다. 그림 속 풍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 위에 끼어든 반짝이거나 흐르는 도상들은 그 거리를 한순간에 좁혀버린다. 도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 풍경은 우리의 눈 바로 앞에 있는 스마트폰 속의 만화나 웹툰으로 들어가 사진이나 그림이 되어버린다. 화면 속의 그것과 같이 가까워진 시야는 한정 지어진 프레임에 튕겨 나와 다시금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으로 들어간 관람자의 시야는 또 다른 신체가 되어 그림/풍경을 프레이밍 한다.

풍경 위로 침투한 불연속적인 형상은 그로 인해 우리에게 공간을 작동시킨다. 이 공간은 객관적 세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는 풍경이다. 실루엣으로 합쳐진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어떤 순간을 포착한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 위에 끼어든 반짝이와 흐르는 도상은 분명히 현실에서 '볼수는 없는 이펙트들이다. 화면 속에만 있어야 할 이펙트가 현실의 공간으로 끼어 들어왔다. 침투한 이펙트로 인해 공간은 일련의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가 된 공간의 풍경은 뛰어다니는 불연속적 형상의 배경이 된다. 풍경 속에서 나온 그것은 다음 프레임으로, 또 다음 프레임으로 뛰어다니며 이 풍경들을 연결시킨다. 연결의 흐름은 우리의 시선이 되며 형상의 성질을 우리의 신체로 끌어들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감각하는 시선이 경험되는 방식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다. 신체는 고정되지 않으며 풍경 또한 그 신체를 따라온다. 이때 따라오는 풍경에 이펙트가 끼어드는 현상은 이미지의 공간과 실제의 공간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 그 경계는 분리할 수 없고 우리의 감각은 뒤섞인 채로 경험된다. 이 작동되는 망막의 풍경을 살펴보며 우리의 신체가 거주하는 공간에 대해 톺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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